이미연, 우리가 가야할 길, 2024, Acrylic on paper, 93×75cm 


이미연, 칼란다의 구름 #03, 2023, Acrylic on canvas, 148×113cm 


이미연, Engadin Woods #95, 2024, Oil, acrylic on canvas, 130×100cm 


이미연, Engadin Woods #82, 2023, Oil, acrylic on paper, 42×30cm 


이미연, Engadin Woods #83, 2023, Oil, acrylic on paper, 42×30cm 


이미연, Engadin Woods #93, 2023, Oil, acrylic on paper, 42×30cm 


끔찍한 사랑


이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자라는 시간 동안 엄마는 이전까지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아이가 먹고, 자고, 노는 시간에 맞춰 하루를 보내게 된다. 아이의 표정과 웅얼거림으로 소통하고, 아이의 몸과 마음이 안전하고 편안할 수 있도록 온 마음을 쓴다. 새로운 세상 속에서,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듯한 상태로, 언제 끝날지 모를 하루 하루를 연다. 작은 생명체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내게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몸도 마음도 지친다.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었던 시간을 꿈꾼다. 나와 달리 스스로에게 24시간을 모두 사용하는 지인 혹은 타인을 보며, 원래의 내가 욕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조차 묘한 박탈감을 느낀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가 더 없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더더욱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내적 갈등은 역설적으로 더 커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를 지지하고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만큼, 내게 온 이 아이를 온전히 보호하고 잘 키워내고 싶은 갈망 역시 크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이미연의 작품은 지금까지의 작품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전작에서 다루었던 스위스의 깊은 산과 하늘, 숲과 나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그간 작가가 엄마가 되었고, 그 사랑스러운 아이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엄마의 작품과 화구를 관찰하고 싶어하는 아이, 쉴 새 없이 “엄마”, “엄마” 부르면서 질문을 던지는 아이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연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처럼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고 그림을 그렸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  

시각적으로 변화된 지점은 전작에서 보이지 않았던 점(dot)과 나무의 옹이처럼 생긴 소용돌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Engadin Woods #82〉(2023), 〈Engadin Woods #83〉(2023), 〈Engadin Woods #93〉(2023) 등에서 밝은 형광핑크 배경 위의 파란 점, 파란 배경 위의 붉은 점 등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채의 점들이 배경을 가득 채운다.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감정을 누르고 매일 해내고 있는 작은 일상의 ‘과업’들을 연상시켰다. 작은 점들이 모여서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전체가 풍경을 만들듯이,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면 점차 아이는 자라서 독립적인 존재가 될 것이고, 그러면 다시 엄마는 온전한 하루를 다시 갖게 될 것이다. 관객은 작가가 틈을 내어 그린 작품들 중 일부만을 만나게 되지만, 우리가 전시장에서 만나지 못한 작은 작품만큼, 더 정확히는 손으로 붓을 잡지 못한 순간에도 작가가 머리 속에서, 마음 속에서 구상하고 그려낸 수많은 그림들이 쌓여서 작가를 지탱하고 다른 국면으로 이끌어간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일상의 때론 지루하고 예술과 무관해 보이는 순간들이 쌓여서, 같은 장소, 같은 공간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든다. 

〈칼란다의 구름 #03〉(2023)와 〈칼란다의 땅거미〉(2024) 에서는 단순화된 형태로 산을 그렸다. 하늘 앞의 산처럼 보이는 풍경이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면) 뒤편의 푸른 공간은 하늘이 아니라 뒤편의 산이라고 한다. 구름보다 높은 산, 하늘만큼 높고 광활한 산들의 풍경이다. ‘산 너머 산’이면서, ‘하늘 같은 산’이다. 여기서는 특정한 지역의 산과 숲이라는 구체성이 다소간 흐려졌고, 작가의 기억 속 풍경, 마음 속 풍경처럼 비춰진다. 강렬한 기억을 남겼던 특정한 풍경, 숭고함과 경외감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일상과 다른 비일상성의 공간이 되었다. 곽희는 〈산수훈〉에서 “사람들은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서 세속(世俗)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연하와 구름 속의 선인이나 성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서 마음으로는 늘 임천(林泉)의 뜻이나,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벗 삼기를 원하나 가까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묘수(妙手)를 얻어, 생생하게 이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고 썼다. 세속을 벗어나 이상적인 산수를 그리면서 마음을 정화시킨 산수화가들처럼 이미연의 이 풍경은 외관을 따라 그린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지향하는 마음의 상태를 그리는 것인 동시에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드물게 인물이 등장하는 〈우리가 가야할 길〉(2023)일 것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예술가’에서 ‘엄마/예술가’라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선 작가의 자화상이자 출사표 같은 작품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은 출산과 육아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가 여성 예술가들로부터 강한 질타를 받았다. 그 중 한 명이었던 카라 워커는 딸 옥타비아를 키우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성장해서 예술가가 된 옥타비아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의 (예술가로서) 경력과 양육 모두에서 어머니의 성공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는 어머니가 살았던 두 개의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엄마다. 그리고 예술가이다. 그리고 그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느낀 적이 없다.”[1] 카라 워커처럼 이미연 작가도 앞으로 포기할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오가며 살아갈 것이다. 비단 작가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가야 한다. 삶의 단계에서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맡고, 과거의 자신과 새로운 환경 속의 자신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조정과정을 겪는다.  작가가 지금 생활하는 도시와 그림의 배경이 된 먼 산간 지역은 아득히 멀다. 그 두 공간의 거리만큼, 그 속의 일상도 다른 모습으로 채워진다. 작가는 과거의 시간 속에, 저 멀리 어딘가 두고 온 자신을 기억하며, 앞으로 만날 미래의 자신을 준비하면서 최선을 다해 그 둘을 연결하고 있다.  

우리가 타인을 돌보아야 하는 순간, 즉 타인에게 나의 시간, 즉 나의 삶을 온전히 내주어야 하는 순간을, 불현듯 마주하게 될 수 있다. 그 대상이 아이일 수도 있고, 혹은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배우자일 수도 있고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연의 그림들은 그 전환을 겪어 왔고/겪고 있고/겪게 될 우리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작가가 치열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삶에서 ‘작업’이 무엇인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왜 계속해서 그리는지 생각하며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그래서 이전의 작품보다 뜨거워진 작품들을 보면서 응원하게 된다.  두려움마저 주는 높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듯이, 작가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씩씩하게,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함께 걷는 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기를.  




[1] “In writing about my mother’s successes, both in her career and in raising me, I realize that I never put much thought into the two distinct worlds she inhabited, because she navigated them both so effortlessly. My mother is a mother. And an artist. And the two never felt like they were incompatible.”(옥타비아 인터뷰 원문)